Bow River, Calgary


영상 9도의 맑은 날
포근한 봄날씨 같았던 날
참을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등짐으로 진 채
그렇게 열린 하늘 속을
날아가듯 자전거를 탔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삶은 무심히 흐르는 강물
같았다




72km bike ride on Saturday.

3 hours trip with 700m total elevation gain.

한국에서는 멀지만 여기서는 가까운 쿠바에 25주년 기념으로 다녀온 여행기인데 앞으로 한국과 쿠바가 수교되면
쿠바 여행에 관심있는 분들이 더 많아 지지 않을까 싶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싸돌아다니길 지극히 좋아했던 나는 날마다 여행을 꿈꾸다 못해 언젠가부터 일
상의 삶을 여행처럼 살자고 모토로 삼았다. 출퇴근 길을 여행길처럼 여기며, 날마다 보는 주변의 풍경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칫 일상에 눌린 삶에 신선함을 불어 넣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로망을 위로해왔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잠재울 수 없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여행의 참맛은 바로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곳,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데에, 즉 탈출에 있기 때문이다.


늘 가던 출근 길, 등교길을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며
늘 먹던 음식의 지루함으로부터도 벗어나 전혀 새로운 맛을 탐험하며
늘 잠자던 방을 떠나 낯선 잠자리에서 마음껏 어질러도 보며 지내는 해방감.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재미없는 일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순전히 나 자신의 기호를 위해, 자신의 완전한 만족을 위해 창조적으로 일정을 짤 수 있는 자유. - 여행이 주는 자유다.

캐나다로 이사온 후 캐나다 서부 록키산 일대와 밴쿠버, 동부 토론토, 몬트리올, 퀘벡 등을 여행하고
미국의 LA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지를 다니며 제법 여행을 다니긴 했으나 우리나라로 쳐서 해외 여행은 이번 쿠바 여행이 처음이었다.

카리브해의 그림같은 풍경에 더하여 세계적인 살사 춤과 쿠바 음악, 그리고 월드 유네스코로 지정된 하바나, 트리니다드 같은 고도(古都), 시가와 야구와 사탕수수, 체게바라로 유명한 혁명의 나라 쿠바는 나의 캐나다에서의 첫 해외 여행지로, 특히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 꿈꾸어온 내 마음 속의 여행이었다.

그들의 음악과
그들의 열정과
그들의 역사
그들의 삶을 만나고 싶었지.
그러나 첫 만남이어서인지
참 많이 서툴렀던 것 같아.

비록 사전에 많은 공부를 하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지나치게 사전 계획에 따라 움직이진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잊어 버리고..
보는 것과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여행의 참맛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진이 나의 꿈을 앞서가지 않기 바랬지만
이미 여행 시작 전부터 여행의 절반을 차지해버린 사진.

그러나 다녀와 그 많은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나름 고마운 점도 있어.
내 여정을 스쳐간 수많은 쿠바의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들을
2000여장의 사진들이 꽤 보여주고 있으니...

그런 중에 여행은 우리로 삶에 경외심을 갖게 하며 마치 할일을 한 것처럼
여겨지니 참으로 인생이 여행길임에 틀림이 없어.

내 카메라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Castillo del Morro, 즉 모로요새이다.
수백년 전의 역사를 내 사랑스런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는 것과
그것을 내가 또한 함께 바라보고 있음에 감격하며 쿠바를 가슴에 품는다.


오랫동안의 꿈이었어
너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지.
푸른 바다를 사랑하여 보기만 해도 눈물 흘릴 줄 아는 소년이었기에
화려하고 세련된 곳보다 허름하고 낡은 풍경에 늘 마음이 편했기에
바다를 보면 언제나 숫총각의 설레는 가슴 마냥했고
하릴없어도 뒷골목 시장 다니기를 좋아했어.

음악을 들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글이 떠올라 언제나 연인처럼 사랑했던
지나온 삶에 더하여 신기하고 낯선 풍경에 넋을 빼앗기기 일쑤여서
새로운 곳이면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이 여행은 내겐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여행, 한 번으론 결코 충분치 않고
두 번 세 번도 모자랄 만남이 되었지.


그러나 무엇보다
25년을 함께 살아오며,
34년을 사랑하며 살아온 지나온 날들이 내겐 꿈같았고
세상 모든 것들이 너로 인해 비로소 의미가 되었기에
이 번 여행의 가장 큰 행복은 너와 함께 했다는 것이야

꾸바는 모든 것이 낡았다.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아바나 거리에는 Ford와 GM 의 4-50년대 차량들로 가득한데 지난 50년간 미국이 주도한 경제봉쇄로 인한 것이지만 이것이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한 요소이니 또한 아이러니다.
그들의 가난이 오히려 세계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나 해야하나.

여기서 명칭이야기 하나.
앞으로 쿠바(특히 큐바) , 하바나, 카리브 해가 아니라 꾸바, 아바나 그리고 까리베 해라고 쓸것이다. 당연하다. 서울이 쎄울이 아니며 최씨지 초이씨가 아닌 것과 동일하다.

Cuba 를 쿠바, 심지어 큐바로 읽고 부르며 Habana 를 하바나로 부르며 Havana로 철자까지 바꾸는 것에서 나는 제국주의의 잔재가 느껴졌고 제국주의와의 오랜 투쟁의 결과 세워진 나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다.

꾸바는 에스파냐어를 쓰는 나라이며 꾸바, 아바나는 그들의 고유 명칭이자 원래의 발음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은 원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꾸바를 쿠바나 큐바로 부르는 것은 마치 독도를 다께시마로 부르는 것과 같은 늬앙스로 여겨지니 지나친 견강부회인가.




꾸바는 스페인의 수백년에 걸친 잔혹한 통치와 미국의 야비한 침탈과 맞서며 세워진 나라이다. 스페인의 차별 받던 백인과 아프리카로부터 사냥해온 흑인 노예들이 함께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어 독립을 쟁취하고 혁명을 성공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흑백 통합국가이며 차별없는 혼합인종국가이다.

세계적인 그들의 음악 역시 이와같은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해 지역과 삶의 각기 다른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혼합하여 만들어졌다.
손, 룸바, 살사, 맘보, 차차차 등 다양한 꾸바의 음악 장르는 죄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섞이며 자연스럽게 재창조된 형식이다. 자유롭다. 관대하며 밝고 명랑하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조화와 어울림이 있다. 바로 꾸바 음악의 특성이다.

아바나 비헤아 광장에 있는 Cafe Tabernet 에서는 매주 토요일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이 열린다.

내가 본격적으로 꾸바를 동경하기 시작한 것,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음반과 영화로 만나고 난 다음부터다. 그리고 아바나에서 그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만났다.

물론 오리지널 멤버는 하나도 없지만 원래의 명성과 재능과 자긍심에 걸맞는 연주실력과 무대 매너로 꾸바여행의 기쁨을 만끽하게 했다.

척박한 삶의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어둡고 칙칙한 슬픔을 노래하기 보다는
까리베 해의 찬란한 태양과 쪽빛 바다에서 느껴지는 희망과 꿈을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있는그대로 표현해내는 그들의 음악은 내가 그토록 원하는 인간 본성의 자유롭고 긍정적인 면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꾸바 여행 최고의 매력은 그들의 음악에 취하는 것이다.


전쟁 직후의 페허같은 모습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는 아이러니. Habana Vieja, 아바나 비헤아, 즉 올드 하바나 지역이다. 야릇한 매력이 넘치는 아바나 여행의 성지인 이 곳이 꾸바 관광의 핵심 중 하나이니 우리는 그들의 가난을 구경하러 온 것인가.

3000여개 가 넘는 중세 시대의 건물들이 대부분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해 페인트는 다 벗겨지고 창문틀과 문짝은 너덜거리며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고 부실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어 관광 이전에 있는 그대로 그들의 열악한 삶의 한 단면을 목도한다.

그러나 이 것이 월드 유네스코로 지정되어 세계인들을 부르는 관광자원이 된 것은 분명 시대의 아이러니다.

아바나 대극장의 모습이다. 고전 바로크 양식의 건물과 매우 잘 어울리는 거리를 질주하는4-50년대의 올드카가 매우 이색적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아내.. 특히 조형미가 뛰어난 건축물에 매력을 느끼기에 고전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즐비한 아바나 여행은 그녀에게 행복할 수 밖에 없었다.



쿠바는 체게바라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에 그의 사진과 그의 기념물이 있다. 골목마다 게바라의 얼굴이 보인다.

40년이 지났지만 게바라는 아직도 쿠바 민중의 가슴 속에 살아 혁명을 이끌고 있는 듯 하다.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체 게바라의 업적과 그 인간성이 뛰어나다고 한들 40여년의 세월을 변함없이 지속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전설적인 인물의 지극히 높고 지순한 꿈과 이상, 그 가운데의 헌신적이며 드라마틱한 삶.. 그리고 극적인 죽음까지. 체게바라는 혁명 동지였던 카스트로에게 신이 내린 은총이었고 죽어서까지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것이다.

아스따 라 빅또리아 시엠쁘레 !! 승리의 그날까지 !!

바나를 여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매료되는 곳이 있다. 말레꼰이라 불리는 방파제 길이다. 다큐벤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인트로 부분에 나오는 명장면..

꾸바의 아이콘 중의 하나인 올드카가 말레꼰 도로를 달리고 방파제를 넘어 지나는 차를 덮치는 까리베 해의 파도..
그러나 이번에 나는 이 장면을 찍지 못했다. 여행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는 법.

아바나의 말레꼰 방파제 길에는 꾸바인의 여가, 무료한 삶과 함께 그들을 보러온 관광객들의 여가, 분주한 여행이 공존한다.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찾게 되는 곳, 말레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맹구와 까끼로 서로 사랑하다 결혼하여 25주년. 그리고 함께한 꾸바 여행 . 신나게 시작해보자.



 

카나나스키스 록키의 언덕 한켠에서

엘보강을 내려다 보며 

애처로운듯 피어있는 한 무더기의 보랏빛 꽃

바람부는 가파른 언덕에 애처로운 듯 

옹기종기 모여 꽃을 피워낸 녀석들의 모습에서

이름모를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흔해빠졌기에 Common이라고 이름 붙였겠지만

그래서 더욱 친근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의 단순한듯 단아하고 청순한 자태 

귀해보이기까지 우아하고 고운 보라색은 

전혀 천박하지 않은 깊은 매력을 지녔다.


험하고 거친 자연 속에 아무렇게나 피어 

세상의 평범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지천에 있어 오히려 더욱 사랑스러운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이름은 

Common hare bell  이다. 


* 한국이름으로는 잔대꽃입니다. 이 녀석의 뿌리는 사삼이라는 한약재로 쓰입니다.

  가래 기침 해소에도 좋고 음기가 허한 데 좋은 효능을 가지고 있지요. 지혈작용도 해요. 

영화가 주는 즐거움 중 으뜸은 영화속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지리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 속의 그들의 삶을 경험한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으로서의
동일한 공명 속에서 서로 호응하고 있음에 놀란다.

인간은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존엄하며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에게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개조하고 단죄할 권리가 없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나에게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도 있고
모두에게 있는 존엄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다.

터키 영화 I saw the Sun 이 호소하는 메시지는 이제 어쩌면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클리쉐일지도 모르겟다.
테러와 전쟁으로 인한 비극, 그로 인한 인간성의 파괴, 비극적 가족사등은
오히려 영화가 나온 그 때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영화는 거칠고 야성적인 터키어의 발가벗은 듯 강열한 느낌에 힘입어
보는 이의 감성과 이성을 두드려 깨우고 인간 존재의 존엄함을 회복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를 멋지게 표현했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쿠르드 족의 고산 빌리지와 터키 제일의 도시 고도 이스탄불,
지극히 이성적이고 인간적이며 현대적인 노르웨이의 풍경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며 자기들 뜻과는 상관없이
격랑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쿠르드 가족의 비극적이고 격정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비극적 주제와 맞물려 전개되는 그들 가족에 포함된 성적 소수자의 또다른 비극적 삶을 통해
인류가 이뤄내야할 진보의 강물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한참 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 최대 도시 이스탄불...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을 거쳐 오스만 터키의 수도였던 인구1500만에 이르는 거대도시..
비록 영화는 필요에 의한 보여줄 것만 보여주었으나 한 눈에 보아도 아름다운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도 이성적이며 인간적이며 별천지 세계로 살아가는 노르웨이의 오슬로..
평화롭고 깨끗하며 지성적이나 그들만의 세계.. 언제나 흐려 태양을 그리며 살아야하는 곳.

분명 나은 조건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나 낯선 이방인의 땅.
그러나 그들 쿠르드 족의 하늘 아래 고산 마을은 언제나 해가 있어 아름답고
또한 차별과 다툼없이 그들이 원래 살아온 그대로 살 수 있는 곳이라 익숙한 곳.

"비록 전쟁통의 척박한 땅이지만 늘 불러왔던 노래 그대로 부르며
내땅에서 서로를 품고 사랑하며 살아온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것인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스탄불을 여행한 기분. 안가봐도 될 듯 ㅎㅎ


아마추어의 어원은 '무엇인가를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의 라틴어 Amator 에서 비롯되었다.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 헌신적인 친구의 의미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모자라고 경험이 없거나 또는 서툰 사람이 아마추어가 아닌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 중에는 그런 사람도 있긴 하지만 아마추어의 분류가 기술적으로 분류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 내말의 요지다.

어떤 일을 사랑하고 그 일로 인한 결과들에 애정을 가진 채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한 아마추어다. 따라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마추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재능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곁에 좋은 친구, 조언자, 협력자가 있어야 한다. '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더 나를 믿어주는 사람' 이 있어야 한다.

나는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오늘 이것을 정치에 한하고 싶다.
항간에 문재인 정부를 아마추어라고 한다. 특히 안보 국방 부분에서 그러하다고 했다. 나는 그말에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다.
문재인 아마추어 정권 운운은 내게 좋지않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숱한 반노 보수들이 노무현 정부를 아마추어라고 욕하기 시작했다. 뭣도 아는 것도 없는 묻지마 보수들, 어중이떠중이 모두 그렇게 비아냥 거렸다. 아마추어 정부라고. 뭐가 아마추어인가. 노무현은 국민을 불편하게 했다. 그냥 알아서 하면 될 걸 시시콜콜 모든 것을 공개했고 국민의 참여를 요구했다. 권력기관이나 언론 등에 대통령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숨죽여 잠자던 모든 생쥐같은 언론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중동이야 원래 그렇다치고 온갖 듣보잡들도 활개를 쳤다. 급기야 우군이어야할 한경오도 쌩까기 시작했다. 최장집 손호철이 때만났다. 소위 엘리트들과 그 주변무리들은 좌우를 떠나 아웃사이더 노무현을 처절하게 짓밟았다.

나쁜 대통령,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안한다는 둥.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친재벌이라는 둥. 노무현은 사면초가로 고립되어갔다. 정책의 잘 잘못을 떠나 결국 노무현은 수족잘린 정부가 되고 말았다. 그 아마추어 정권을 지켜내지 못한 결과 나라의 재앙 이명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말았다.

다시 돌아와서, 문재인 정부가 아마추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 내치 및 외교적으로 이나라가 망가진 것은 단연코 지난 60년 우파 독재 군부 재벌 및 관료 기레기 언론들에 의한 것들이다. 그들은 프로라서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었나. 맞다. 아마추어 정신이라곤 하나없는 돈밖에 모르고 권력만 탐했던 야비하고 더러운 프로라서 그랬던 것이다.

아마추어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기에 헌신적이며 공익적이고 오직 사랑으로 임하는 사람이다. 문재인 정부가 아마추어라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마추어이어야 한다.

그런데 MB가 싸지르고 그네가 벽에 칠한 그 똥, UAE 똥을 치워내는 것보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리 아마추어도 아니다. 국가간 합의를 파기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그 똑같은 효과를 내는 위안부 합의안 처리하는 것을 보아도 이전의 친일 정부들이 프로답지 않은 프로로 해먹은 것에 비하면 훨씬 프로 같기까지 하다.

나는 수많은 SNS 세력, 눈에 띄진 않지만 SNS 의 많은 논설가들, 예를 들어 내 페친 신명식 귀농인, 배규식 박사같은 분들이야말로 이 정부가 아마추어의 정신을 지닌 진정한 프로가 되어가도록 조언하고 협력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참 지식인, 참 언론, 참동지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은 이런 닳고 닳은 프로 비굴이 정치인들의 허리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정치인은 그가 프로건 뭐건 이미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진배없다.





2년전 알버타 주는 40년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허물고 좌파 NDP (신민주당) 가
선거 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였고 레이첼 노틀리 당수가 역대 두번 째 여성 수상이 되었다.

알버타 정치는 지난 40여년간 보수당 깃발만 꽂으면 개가 나와도 당선되는 그런 곳이었다. 산업 노동자가 없고 거의 자원과 목축 농장 등으로 먹고 사는 곳이니 그러했다. 트뤼도 현 수상 이전의 캐나다를 10년간 장기 집권해온 보수당의 스티븐 하퍼 수상이 알버타 캘거리 출신이었을 정도로 알버타는 보수일색이었다.

알버타 인구의 3분이 1이 사는 캘거리. 주도는 아니지만 오일 컴퍼니 헤드쿼터가 모여있는 이곳에 젊은 인구와 이민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보수적 정치색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알버타 보수일색 정치에 첫번 째 파열음은 무슬림 이민자 출신, 나히드 낸쉬가 캘거리 시장으로 당선 되면서 시작되었다. 올해 3선째로 확고한 기반을 쌓은 인도 출신의 이 정치인은 역대 시장들의 보수적 꼰대성향을 뒤엎고 SNS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업고 캘거리를 잘 이끌어 왔다.

알버타는 그동안 캐나다 연방에서 NDP 가 한 번도 정권을 잡지 못했던 유일한 주로 남아 있었던 터라 노틀리 좌파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수세력은 알버타 주민의 바닥에 깔린 보수심리를 이용하여 집요하게 흔들기를 해왔다. 마침 NDP가 정권을 잡을 즈음 시작된 글로벌 오일 가격 하락으로 알버타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 보수 세력의 흔들기는 더욱 힘을 얻어가는 형국이다.

사실 알버타주 경제불황은 현 NDP 정권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쉽지 않은 이유도 현정권의 무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정권, 즉 보수당 정권의 무능과 장기집권의 후유증으로 인한 것이다.

과거 오일경기가 붐을 이루었던 시절 아시아등으로 원유수출을 다변화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미국에만 의존했던 것과 엄청난 로열티 수입을 활용하여 알버타 경제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쓰지 않고 방만하게 써버린 결과 미국의 환경론자들이 득세하고 국제 오일 가격이 폭락해버리자 알버타 경제는 순식간에 바닥을 쳤고 이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지난 40년 보수당 1당 장기 집권이 초래한 포퓰리즘 등 정치 비효율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현 알버타 좌파 정부는 보수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을 올해까지 15불로 인상하는 안을 밀어부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주민들의 저항에도 환경보호를 위한 탄소세를 도입하여 정착시켰는데 이는 다음 총선을 앞두고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자살행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소수와 약자 보호, 지구환경보존이라는 좌파정부로서의 철학을 잃지 않고 소신껏 나아가는 것을 보면 노틀리 수상의 정치인으로서의 일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여년 전 알버타 주민들은 보수당 정권으로부터 1인당 40만원에 달하는 번영 보너스를 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4명이어서 160만원을 수표로 받았다. 당시 알버타 인구가 350만명 정도였으니 무려 1조 4천 5백억이라는 소중한 공적 자금이 주민들에게 1회성 선심으로 흥청망청 써버린 것이다.

이는 명백한 무개념 포퓰리즘 정치였다. 근래 이재명 성남시장이 이와 비슷한 선심행정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당당하게 스스로를 표퓰리스트라고 표명했다. 표풀리즘은 두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대중주의(또는 민중주의) 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추수주의다. 전자는 엘리트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기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재명 시장이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을 때는 이와같은 민주적 대중주의로서의 의미일 것이다. 후자는 정책의 제도적 시스템화에 반하는 것으로 임기응변식 인기 영합주의를 말한다. 시스템화를 벗어난 이와같은 인기영합주의는 매우 나쁜 정치의 한 형태이다.

나는 이재명 시장의 정치철학의 기본은 민중적 대중주의라고 보지만 이번 선심행정은 명백한 인기 영합 대중 추수의적 형태로 아주 나쁜 의미에서의 포퓨리즘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남아도는 돈은 당연히 공적 자금으로서 성남시의 미래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정 쓸데가 없으면 중앙정부와 협의하에 이웃의 가난한 지자체에 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돈을 받으면 우선 기분이 좋다. 그리고 아무리 미미해도 탄소세등 세금이 오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이율배반이다. 환경과 복지는 좋으나 세금인상은 싫어한다는 것. 이게 일반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거꾸로 가야 한다. 정치가 민의를 반영해야하지만 진정한 민주정치란 정치인의 앞서가는 세상에의 비전을 주민들이 말하고 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버타 보수당의 지난 세월 보인 포퓰리즘적인 정치와 미래에 대한 비전없는 정치는 당연히 배격되어야 한다. 반면에 NDP 좌파정부의 소신있는 정책 방향, 때론 주민들의 인기를 잃는 정책이라도 소수와 약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과 인류사회 나은 미래를 향한 것이라면 주저없이 시행하는 모습이야말로 참된 사회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캘거리는 올림픽으로 한국과 제법 인연이 있다.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때 캘거리는 같은 해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했었다.
그리고 이제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는데 캘거리 역시 2026 동계올림픽
유치신청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데 비해 경제적 효과는
미미하고 대회 기간 중 불편 사항도 많은 데다가 올림픽에 대한 관심과 호응도 옛날같지 않아서이다.

올림픽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스포츠는 정치와 무관하며 그래야한다고 떠들곤 있지만 대개는 헛소리. 역대 거의 대부분의 올림픽이 국내외적으로 정치에 이용당하고 휘말렸다. 사실 근대 올림픽의 시작부터가 정치적이었다.

지독한 인종주의자 쿠베르탱 영감탱이는 백인들의 우월성과 남성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일환으로 올림픽을 창시했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올림픽 창시였다. 그리고 "계집애들이 무슨 올림픽인가.." 라고 말하기까지 한 쿠영감탱이는 여성차별주의자였으며 세상엔 1등 백인 종족과 그외 2등종족이 있을 뿐이라고 외친 인종주의자였다.

그 전통에 따라 올림픽은 인종주의가 끊임없이 표출되어왔다. 심지어 레슬링 퇴출위기는 인종주의의 극명한 본보기다. 남자는 이란이 휩쓸고 여자는 일본이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독보적 종목인 양궁에서 오직 한국만을 겨냥하여 룰을 수없이 바꾸는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아도 올림픽은 백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잔치여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를린 올림픽은 인종주의 올림픽의 표본이었다. 아리안 족의 위대함을 알리는 올림픽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제시 오웬스라는 탁월한 인물과 손기정님에 의해 히틀러의 자존심은 팍팍 구겨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여성운동의 약진에 따라 여성 올림피안들도 획기적으로 늘어갔다. 인종 및 성 차별적 성격은 인류진보의 물결을 타고 희석되어갔다.

즉 정치적 인종적 한계를 가졌음에도 올림픽은 지구촌의 잔치로 발전해왔다. 그러한 올림픽 진보의 힘은 올림픽 정신에 있다. 많이 훼손되긴 했으나 여전히 고귀한 정신으로 추앙받는 순수한 아마추어리즘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인류 화합의 잔치라는 점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평창 올림픽의 남북 동시 입장과 여자 하키 단일팀은 올림픽 정신에 매우 부합하는 의미를 지닌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 위기를 해소하고 상호 긴장을 풀어내는 것에 이보다 더 극적인 이벤트가 어디 있었겠나. 평창올림픽을 이명박정권이 유치할 때 한반도의 통일염원을 담아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표를 받았다. 과거 여당이 단일팀 구성 등에 적극찬성한 것도 바로 이와같은 올림픽 정신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바가 크기 때문이다.

여자 하키 팀의 일부 선수들의 실망이 컸다는 점 이해가 간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여자하키도 평창 올림픽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 구경하게된 것 아닌가. 그동안 여자 아이스하키가 한국 스포츠계에서 무슨 존재감이 있었으며 올림픽 이후 스포츠의 대중적인 지속성 역시 거의 난망하다고볼 때 이정도로 국민적 관심 속에서 뜬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할 것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여자 아이스하키가 좋은 스포츠임을 국민들에게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니 단일팀은 좋은 결정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래 잘했던 종목외 많은 생소한 종목들에 우리 선수들이 참가하는데 하키와 함께 이런 종목들에 관심을 가지고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남북 단일팀 결성으로 선수 구성과 출전 시간에 변화가 생겼지만 결국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작은 출발로서의 의미, 즉 대승적으로 해결되었으니 그들이 비록 전패를 하였으나 이미 크게 승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올림픽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펜스 극우 기독주의자 가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나 아베의 똘만이 짓, 그리고 이 두 극우분자들이 개회식 때 단일팀에 대해 보인 무례함은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 정신을 말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한다. 여자아이스하키팀이 올림픽 정신에 맞추어 참가에 큰 의의를 두고 특히 남북이 하나로 뭉쳐 나온다는 것이 주는 상징성을 크게 부각시킨 것처럼.

그러면서도 올림픽이 주는 정치적 도움 역시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 단일팀으로 오랫동안 북핵문제로 전쟁위기 속에 힘들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딛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역사가 증명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우리사회 난맥상의 원인중 하나이다.

사회주의의 내용은 나쁘지 않으나 그것을 이념화 하니 인간이 오히려 고롭다.

진보는 좋은 것이지만 진보주의는 역시 인간을 피곤하게 한다.
뭐든 주의를 붙이면 일단 그것은 달콤한 거짓말이다. 인간 피곤하게 한다.

진중권이나 강준만 부류가 그러한 사람의 표본이다. 최장집이나 오마이 한겨례가

그런 경향을 경향신문과 함께 쉐어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신자유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백성편에 선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대처와 레이건이 눈이 맞아 세상을 말아먹었다.

그런데 신 자유주의는 전후 미국이 세계를 털어 먹다가 일본과 독일에 막히니까 나온

부자들의 경제 타개책이다.(영국이 붙어서 같이 먹었고)

경제전쟁에서 일본과 싸워선 이길 승산이 없으니 (영국은 독일과의 싸움) 신자유주의 들고 나와
미국내 하층민(그것도 백인하층민) 털어먹은 것이 신자유주의다. 레이거노믹스고 대처리즘의 본질이다.
물론 와중에 애꿎은 개발도상국들도 털렸지만 본질은 자국민 말려죽이는 것, 양극화가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좌파들은 신자유주의와의 힘겨운 싸움을 해왔고 일정부분 성공도 거두었다.
2008년에 몰아닥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가 자멸한 대표적 사례이고 영국의 브렉시트 역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자승자박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표방한 시장원리의 회복은 일정부분 국제경제를 회복시키고 특히 대한민국 같이
뭘 팔아서 먹고 살아야하는 나라에게는 기회가 된 점도 있다.
규제철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정부기능 강화 역시 나쁜 면도 있고 좋은 면도 있다.

무조건 신자유주의라는 잣대로 세상을 경직되게 가치 판단하면 결국 손가락 빨게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증명되고 있다.

80년대말에서 90년대말까지 가능했던 반 신자유주의 연대, 그게 2000년에도 여전히 통한다고 보면 시대착오다.

이미 골방에 사라진거. 그런데도 여전히 신자유주의 타령하고 있었다면 일단 거짓말장이고 지식 장사치라고 보아야했다는 말이다.
비근한 예가 한겨례 오마이 최장집 부류들이 입에 거품물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노무현의 FTA를 씹었던게 바로 그거다.

신자유주의 물론 나쁘다. 계약직 정리해고는 잔인하고 규제철폐 무한 경쟁은 위험하고 부자감세는 공정하지 못하다.
문제는 모든 관련된 정책을 무조건 신자유주의로 이름붙여 공격하는 것 역시 비겁하고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신자유주의자들과 그 비판자들이 무슨 '주의'를 들고 나오거나 그에 기반하고 있으면
일단 가짜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되지 못한 좌충우돌식(시쳇말로 무뇌아들) 이념장사를 보면 안다.

반공주의에 기반한 빨갱이 종북 타령이나 어버이연합등 반공 우익단체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나 기이한 행동들이
그러한 것처럼.

오늘 뜬금없이 신자유주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아니다.
핵심은 이러하다. 무슨무슨 '주의'를 들고나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하여 어쩌고 저쩌고하는 가짜들을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정치에서 다 솎아 내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가짜라고 보면 된다는 얘기다.


바른당과 국민당이 합당했다. 건전한 보수를 위하여 합당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가짜들의 생존전략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중도 타령, 개혁적 보수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라는 이념은 없다.

보수는 단지 지키는 것이기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그들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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