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렬의 탄핵은 독재시대의 키워드 자유민주주의론이 지향하는 구시대적 이념정치인 종북몰이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공정아닌 공정, 상식아닌 상식으로 호도한 가짜의 시대를 완전히 끝장내는 신호탄이다.
그리고 비상계엄을 통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자들을 강제적으로 제압 지배하려는 시대착오적 역사 거꾸로 돌리기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청년세대들의 시위에 나타난 새로운 윤리의식은 미래 한국을 이끌 발판이 될것으로 보인다.
먼저 탈이념과 관련하여 지구상 마지막 좌우냉전지대인 한반도의 남쪽에서 그동안 일어난 변화는 사실상 더이상의 남북대결을 무의미하게 만들만큼 양쪽의 엄청난 차이를 극명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지구상 유일하다시피 비정상국가인 북한 체제에서는 꿈도 못꿀 거대한 저항에너지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남북한을 이미 비교불가능한 차이로 만들었고 세계를 선도하기 시작한 사회 문화적 수준에서는 되돌릴수 없을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경제적 차이는 말할것도 없다.
따라서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70년대식 낡은 이념으로 여전히 정치의 발목을 잡는 수구적 우파는 더이상 설자리가 없음이 드러나면서 수구적 보수 언론과 정치세력의 매카시적 프레임 씌우기는 이번 계엄령의 처절한 실패와 더불어 완전히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최근의 K컬쳐 및 국가적 경쟁력은 이와같은 탈이념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확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기에 변화에 민감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년세대들이 마침 절묘한 타이밍으로 찾아온 이 절호의 기회에 미래동력의 주인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이후 한국사회의 방향성의 일단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중한 사건이라고 본다.
부산의 탄핵 집회에서 있었던 18세 여고생의 심장을 두드리는 연설을 듣고 나는 새롭게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윤리의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대부분의 여의도를 메운 10~30대 청년 세대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는 과연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생각해보았다.
비장함보다는 명랑함으로, 투쟁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축제처럼, 죽음이 아닌 살림으로, 분노를 해학으로, 비겁함에 용기로, 사사로운 욕망이 아닌 공리로, 존중과 배려로 그들은 추운 겨울의 어둠을 녹여내고 밝히고 있었다.
촛불의 소극적 저항에서 응원봉의 적극적이며 현란한 저항으로 그 에너지의 분출을 극대화하는 그들의 거침없는 정신을 보았고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을 위해 커피와 빵등을 선결제하는 놀랍고 신선한 배려와 사랑에 감동했으며
자유롭고 분방하되 존중과 질서를 잊지 않는 데서,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로 창의적이며 생산적인 시위를 성공시키는데서 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았다.
윤리는 시위후 쓰레기를 줍고 질서있는 퇴장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는 시대정신이다. 그들의 행위전체에서 찾아지는 시대정신의 반영이 곧 윤리의식이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한국인들, 한국청년들의 모습이었다. 민주주의가 시작된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미국 등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비폭력 광장 민주주의, 그 광장민주주의를 통해 펼쳐지고 이뤄내는 탈이념과 새로운 윤리의 이 시대정신이야말로 왜 한국이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수 밖에 없는지를 온 세계에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넘어야할 산이 남아 있지만 그 어떤 세력도, 그 누구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새로운 시대정신을 거스를수 없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의 새로운 세상을 무한한 자부심과 높은 긍지와 번득이는 지혜, 불굴의 용기로 거침없이 열어 나가라!!
지극히 아름다운 캐네디언 록키의 절경 모레인 호수를 사진으로 잘 찍어내기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론 날씨나 시기 등 운도 따라야 하고 장면 구성에 대한 적절한 아이디어도 필요하고 또는 담력과 체력도 필요할수도 있지요.
그동안 아마 수백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아직도 나는 모레인 호수를 제대로 찍지 못한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유럽인들이 처음 들어온 시기, 모레인 호수를 처음 본 외부인은 예일대 학생이었던 Walter Wilcox 였습니다. 1899년입니다.
케네디언 록키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젊은 대학생이었던 그는 Yale Lake Louise Club 를 만들어 Samuel Allen 등과 해마다 레이크 루이스를 방문했는데 얼마나 이곳을 사랑했으면 예일에서 그토록 먼 이곳을 정기적으로 여행하는 클럽을 만들었을까요.
월터 윌콕스는 1899년 어느날 이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543m의 Temple Mt.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끝도 없이 깊은 나무의 바다 속에서 비와 눈을 만나 이틀을 헤맨 끝에 마침내 눈부시게 맑은날이 찾아왔고 계곡을 올라 rock pile 위에 섰을 때 험준한 바위산들에 둘러쌓인 작고 푸른 호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30분 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깊은 감동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가 후에 이 호수를 모레인 호수라고 명명하고 그날의 감동을 다음과같이 표현하며 그때의 30분은 생애 가장 행복했던 30분, the most happiest half an hour in my life 라고 했답니다.
“No scene had ever given me an equal impression of inspiring solitude and rugged grandeur”
나역시 처음에 이 Rock pile에 올라섰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30분은 아니지만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표현했던대로의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깊은 고독과 위풍 당당한 장관’ 은 정확하게 내 심중에 꽂힌 바로 그 감동이었죠.
그후 나는 수도 없이 이곳을 찾았고 그 주변, 템플산을 비롯하여 바벨타워 산을 오르며 또다른 각도에서의 호수에 감동하곤 했습니다.
인근의 레이크 루이스가 장엄하고 고결하여 완벽한 신의 작품이라면 이 모레인 호수는 절제미에 수려함과 고고함을 갖추어 깊이 감동케하는 인간적인 작품이라 할까요. 대자연이 빚은 루이스 호수의 엄청난 스케일에 의해 압도된 여행자에게 이 호수는 예술작품처럼 편안한 위로를 주는 것 같습니다.
S는 마치 휴양지에서나 볼듯한 멋진 sun hat을 쓰고 진료실에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미인형의 환자는 모자 아래로 흘낏 보이는 첫인상이 다소 어두웠다. 병원에 왔으니 그렇겠지.
S가 견딜수 없는 머리 신경통으로 누워있을때는 제외하고 24시간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2년전 facelift 수술을 받은 후부터였다. S는 처진 안면근육을 위로 올리기 위해 헤어라인을 따라 앞뒤 머리 피부를 절개하고 올린다음 봉합하는 수술을 2년 전에 받았고 극심한 신경통은 그 이후로 시작되었다.
앉으나 서나 24시간 통증이 계속되는데 오직 반듯하게 누우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줄어들어 그나마 잠을 잘수 있었다. 그동안 처음 시술한 의사와 신경통 전문의등 숱하게 병원을 다니고 온갖 약을 먹었지만 낫지 않았고 그 와중에 스스로 발견한 것은 서있거나 앉을때 모자를 쓰거나 헤어밴드를 하면 통증이 확실히 경감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멋진(?) 모자를 쓰고 온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다. 고민을 했다. 일단 미용수술에 의해 신경데미지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런 종류의 신경통이 자연적으로 사라지거나 환자가 통증에 적응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미 2년째다. 그리고 통증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S는 절망하고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이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끔찍하다고 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내게 왔다고 했다.이런 환자에게는 우선 그녀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지에 대한 공감과 함께 내가 어떤 도움을 어떻게 어떤 근거로 줄수 있는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조리있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환자가 어느 정도의 믿음과 희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상담과 설명에 한시간 이 상이 걸렸다.
“무엇이든 선생님이 하려는 것을 받아보고 싶어요”
국소부위에 전침을 사용했다. 그리고 간담경락과 소장 방광경락을 소통시키고자 했다. 한약도 썼다. 신경통증에 효능있는 처방을 사용했다. 한의학의 금과옥조중 하나, ’막히면 아프다. 뚫어주는 치료가 통증치료의 1원칙이다‘ 를 믿고 따랐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장부치료를 병행했다.
첫 침 치료후 잠을 잘잤고 두번째 치료후 하루동안 매우 아파 힘들었으나 그후 이틀은 그럭저럭 보냈다. 한약은 하루 세번 복용. 세번째 치료후 S는 한층 밝은 얼굴로 들어왔고 네번 째 치료후 S는 2년만에 처음으로 4일간 연속으로 한결 나은 상태를 경험했다. 그리고 한 두번 더 치료받고 모자와 헤어밴드를 쓰지 않은 채 내원했다. S도 나도 놀랐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이렇게 좋아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10번의 치료후 S는 여전히 통증이 있고 완전히 낫진 않았으나 이대로 좋아질것이란 희망은 더욱 강해졌다. 이에 나는 S에게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 에 대한 개념을 얘기했다. 물론 이것은 뇌신경과 뉴런에 관한 얘기지만 통증을 감수하는 뇌신경의 회로를 재구성함으로써 오랜 통증에 시달려온 환자의 통증 인지를 리셋할수 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우리 뇌는 특정 만성통증에 대해 고정적이며 민감하게 느끼는 식으로 신경회로가 고착되기 쉬운데 그 것을 훈련으로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이다. S는 나날이 좋아졌다. 이제는 앉으나 누우나 걷거나 어떤 활동을 해도 모자나 헤어밴드없이 통증이 없으며 정상생활을 하고 있다며 삶을 새로 얻은 것 같다고 했다.
아직 완전하다고 본인이 느끼지 않기에 침과 약 치료를 계속 받을 것이며 신경가소성 이미지 트레이닝도 계속하겠다 했다. 해보기 전까지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같다.
우리 인체는 놀라운 치유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그 어떤 인위적 치료보다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그레이스가 내 한의원에 처음 찾아온 것은 10여년도 훨씬 전 어느 맑은 가을날이었다. 한 눈에 딱봐도 극빈 저소득자에 캐나다 사회에서 보기 드문 소외계층이었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진동하며 눈은 퀭한 채 헤지고 낡은 외투를 걸친 모습은 홈리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손에는 그동안 캐나다 의료체계에서 받은 온갖 검사자료를 한뭉치 들고 있었는데 내게 그것을 건넬 때 이미 깊은 체념이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캐나다 의료의 가장 큰 문제점. 숱한 기다림 속에 온갖 검사는 결국 그런데로 해주지만 제대로 된 그 이후가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이혼녀로 청소년 당뇨가 있는 아들과 많은 여성병에 시달리는 딸을 양육하고 있었다. 폭력적 남편은 가족을 팽개쳤고 아무런 도움은 커녕 여전히 가족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중에 그레이스는 소위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안아프 곳을 찾는 것이 빠른. 나는 그날 작정하고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친구가 있을리 없고 파트타임 직장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의사들 조차 5분이상 만나주지 않았다 한다.
더군다나 행색도 초라한 늙은 환자의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들어주고 있을 의사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녀 가슴속에 담겨져 있을 그 모든 아픔, 한,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였을지 생각하며 인내심으로 그녀의 개인사와 원망, 아픔들을 오랜시간 세심하게 들어주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경계심으로 가득차 있었고 피해의식에 쩔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적절히 공감하며 동조하고 또 의학적으로 필요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었더니 모든 의심과 어색함을 풀고 천진한 미소까지 지으며 자연스럽게 모든 이야기를 토해내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힐링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 환자들의 얘기를 끈기있게 들어주고 공감해준다는 것. 어떤 환자로부터는 부부싸움 한 것을 다 듣고는 나름의 해결방안을 주었는데 그게 주효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레이스의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난후 나는 침과 한약치료가 동시에 필요함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오늘은 상담한 것으로만 하고 돈 모아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잠시 생각할 것도 없이 내가 당분간 무료로 치료해주겠다고 했다. 형편이 나아질 때 까지. 그녀는 고마워 하면서도 다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료비를 마련해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때 당장 치료가 필요하니 치료를 시작하고 치료비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했다. 그렇게 해서 침과 한약치료를 시작했고 그레이스는 나날이 좋아졌다. 치료비는 결국 반값으로 정했다.
"닥터리, 내가 요즘처럼 희망 속에 있었던 적은 없어요. 이제 내 아이들과 함께 더 열심히 살아갈수 있을 것 같아요"
그후 그레이스는 사회적 삶에 있어서 별로 달라진 것은 없으나 옛날과는 달리 긍정적인 태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며 아이들도 성장하여 이런저런 문제들 있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며칠전, 거의 2 년여만에 그레이스가 찾아왔다.
여느때처럼 내 볼에 키스를 해주며 딸이 이런 말을했다고 전한다.
" 엄마 이제 엄마를 위해 살아. 닥터리 찾아가서 치료받고 엄마를 위해 돈쓰고 살아"
코압 그로서리의 주유소에서 캐시어로 일하는 그레이스. 날마다의 삶이 고되지만 선한 영혼으로 주어진 일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며 늘 아들 딸 걱정 속에 여전히 헌신적으로 돌보며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고귀한 삶. 비록 배운 지식은 짧으나 그 어떤 배웠다는 인간들보다 세상에 해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작지만 큰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