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와서 살았던 첫동네의 가을) 

어렸을적부터 큰 물에 가서 크게 놀아야 한다는 둥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둥
넓고 큰 세상을 목표삼고 살도록 배워왔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떠나 여행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내가 사는 동네만 벗어나도 낯설기 짝이 없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마산도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니어서 어렸을 때는 안가본 곳 모르는 곳이 더 많았다.
그런 곳을 가끔씩 혼자 가보곤 했는데 그 때마다 묘한 두려움과 함께 설레임이 뒤섞이며 
매우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 되곤 했었다.


어쩌다 이웃의 대도시인 부산을 가볼 기회가 있었다. 덜컥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버스를 타고 
두세시간을 가야했는데 멀미로 고생을 하면서도 그 신기하고 재미있는 여행이 얼마나 좋았던지
어렸을 적 최고의 추억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협소했다. 너무나도 좁아서 답답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만큼 평화로웠다. 조용했고 또 느렸다. 


요즘이야 대한민국이 어딜가나 '빨리 빨리' 의 세상이지만 그 때는 서두를 일이 많지 않았기에 
여간해서는 재촉을 받는 일이 없었다. 기다릴 줄 아는 세상이었고 기다림이 있는 세상이었다.
기다림은 세상을 부드럽게 해주는  완충장치와도 같다. 기다림은 또 그리움을 낳지 않는가..


비록 도시라 해도 소음도 적었고 자연의 소리가 살아 있었다. 
골목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주던 때였다. 그런 멋진 세상이었다.


이웃간의 어울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일상중의 하나였다. 
주부끼리 된장도 얻어 쓰고 반찬도 나누고 필요하면 뭐든 빌려주고 나눠 썼다.
겨울이면 김장김치를 함께 담고 여름이면 집 앞에 함께 모여 수박을 나눠 먹었다.
부부함께 일 나가는 이웃을 위해 아이까지 봐주던.. 
지금 생각해보면 소박하지만 정이 넘치는 공동체, 즉 행복한 작은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넓고 큰 세상에의 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져야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은 불행히 좁았다. 때론 공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경쟁이라는 이름의 다툼과 승리의 결과 주어지는 독점은 우리로 더이상 꿈을 나누지 못하게 했다.


서울은 넓고 큰 세상의 상징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에게 성공과 출세의 필수 조건이었고 
인생을 달리기 경주에 비교할 때 서울은 그 긴 여정의 진정한 출발지였다.
누구나 서울로 가야했고 서울은 마침내 대한 민국 모든 사람의 고향이 되었다. 
크고 넓은 세상 서울은 이렇게해서 대한민국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웃간의 어울림은 사라져갔고 나눔은 때로 바보 짓이 되었다.
남보다 앞서는 것이 중요했기에 기다림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기다림이 없는 세상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해갔다. 
뭐든 빨라야 하기에 고속은 초고속 앞에서 무력한 세상이 되었다.


크고 넓은 세상은 시끄러운 세상이다. 다툼과 소유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눔과 공유는 효율성이라는 잣대에 의해 철저히 배격되어졌다.
이웃이 가진 모든 것은 내게도 반드시 있어야하기에 세상은 소유로 넘쳐났지만
정작 소유로부터 소외된 수많은 존재들도 생겨났다. 
그러고도 사람들은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의 소유를 위한 새로운 경주에 몰입했다. 


이제 크고 넓은 세상은 더이상 평화롭지가 않았다. 
평화는 나약한 존재의 자기 패배 선언에 불과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함께 살아가는 지혜와 예절보다는 혼자서도 잘살아가는 지식과 기술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둘 작은 세상을 그리워하고 다시 꿈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극심한 경쟁과 소유로 무장한 서울이 점령한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작은 세상은 찾아 보기 쉽지 않다.
있다하여도 그곳은 가끔씩 들르는 휴가지 이거나 특별한 날에만 존재하는 비 일상의 세계이다.
또는 힘겨운 노력으로 만들어가야하는 특별한 존재들의 이데아거나. 


캐나다에 이민와 산지 어언 9년. 넓고 광활한 땅 캐나다. 세계 2위의 넓은 나라.
그러나 그런 캐나다가 작은 세상인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느려터진 캐나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적막강산같은 나라,

촌스러움에도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개발해서 돈벌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버려두는 나라,

크리스마스 이브, 일요일에 저녁 5시면 모두 문을 닫아버리는 상가들,

이웃이 집을 비우면 잔디 대신 깎아주고 물도 주는 사람들,


길에서 싸우고 큰 소리 치는 사람 없고 자동차 경적 소리 들을 수 없는 나라,

길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또 그렇게 무던 애를 쓰며 걷는 사람들의 나라,

경제가 어려워져도 최저임금을 올리고 부자와 기업에게 증세하며 분배정의를 행해 나아가는 나라,


수도 없이 많은 도네이션으로 움직여지는 사회,
자원봉사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사회,
세계 모든 인종, 문화, 민족이 한 곳에 모여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세상,
내가 꿈꾸고 사랑하며 진정 가치를 둔 세상, 작은 세상의 모습을 가진 곳. 



작은 세상 데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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