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의 어원은 '무엇인가를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의 라틴어 Amator 에서 비롯되었다.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 헌신적인 친구의 의미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모자라고 경험이 없거나 또는 서툰 사람이 아마추어가 아닌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 중에는 그런 사람도 있긴 하지만 아마추어의 분류가 기술적으로 분류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 내말의 요지다.

어떤 일을 사랑하고 그 일로 인한 결과들에 애정을 가진 채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한 아마추어다. 따라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마추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재능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곁에 좋은 친구, 조언자, 협력자가 있어야 한다. '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더 나를 믿어주는 사람' 이 있어야 한다.

나는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오늘 이것을 정치에 한하고 싶다.
항간에 문재인 정부를 아마추어라고 한다. 특히 안보 국방 부분에서 그러하다고 했다. 나는 그말에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다.
문재인 아마추어 정권 운운은 내게 좋지않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숱한 반노 보수들이 노무현 정부를 아마추어라고 욕하기 시작했다. 뭣도 아는 것도 없는 묻지마 보수들, 어중이떠중이 모두 그렇게 비아냥 거렸다. 아마추어 정부라고. 뭐가 아마추어인가. 노무현은 국민을 불편하게 했다. 그냥 알아서 하면 될 걸 시시콜콜 모든 것을 공개했고 국민의 참여를 요구했다. 권력기관이나 언론 등에 대통령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숨죽여 잠자던 모든 생쥐같은 언론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중동이야 원래 그렇다치고 온갖 듣보잡들도 활개를 쳤다. 급기야 우군이어야할 한경오도 쌩까기 시작했다. 최장집 손호철이 때만났다. 소위 엘리트들과 그 주변무리들은 좌우를 떠나 아웃사이더 노무현을 처절하게 짓밟았다.

나쁜 대통령,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안한다는 둥.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친재벌이라는 둥. 노무현은 사면초가로 고립되어갔다. 정책의 잘 잘못을 떠나 결국 노무현은 수족잘린 정부가 되고 말았다. 그 아마추어 정권을 지켜내지 못한 결과 나라의 재앙 이명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말았다.

다시 돌아와서, 문재인 정부가 아마추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 내치 및 외교적으로 이나라가 망가진 것은 단연코 지난 60년 우파 독재 군부 재벌 및 관료 기레기 언론들에 의한 것들이다. 그들은 프로라서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었나. 맞다. 아마추어 정신이라곤 하나없는 돈밖에 모르고 권력만 탐했던 야비하고 더러운 프로라서 그랬던 것이다.

아마추어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기에 헌신적이며 공익적이고 오직 사랑으로 임하는 사람이다. 문재인 정부가 아마추어라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마추어이어야 한다.

그런데 MB가 싸지르고 그네가 벽에 칠한 그 똥, UAE 똥을 치워내는 것보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리 아마추어도 아니다. 국가간 합의를 파기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그 똑같은 효과를 내는 위안부 합의안 처리하는 것을 보아도 이전의 친일 정부들이 프로답지 않은 프로로 해먹은 것에 비하면 훨씬 프로 같기까지 하다.

나는 수많은 SNS 세력, 눈에 띄진 않지만 SNS 의 많은 논설가들, 예를 들어 내 페친 신명식 귀농인, 배규식 박사같은 분들이야말로 이 정부가 아마추어의 정신을 지닌 진정한 프로가 되어가도록 조언하고 협력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참 지식인, 참 언론, 참동지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은 이런 닳고 닳은 프로 비굴이 정치인들의 허리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정치인은 그가 프로건 뭐건 이미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진배없다.





2년전 알버타 주는 40년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허물고 좌파 NDP (신민주당) 가
선거 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였고 레이첼 노틀리 당수가 역대 두번 째 여성 수상이 되었다.

알버타 정치는 지난 40여년간 보수당 깃발만 꽂으면 개가 나와도 당선되는 그런 곳이었다. 산업 노동자가 없고 거의 자원과 목축 농장 등으로 먹고 사는 곳이니 그러했다. 트뤼도 현 수상 이전의 캐나다를 10년간 장기 집권해온 보수당의 스티븐 하퍼 수상이 알버타 캘거리 출신이었을 정도로 알버타는 보수일색이었다.

알버타 인구의 3분이 1이 사는 캘거리. 주도는 아니지만 오일 컴퍼니 헤드쿼터가 모여있는 이곳에 젊은 인구와 이민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보수적 정치색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알버타 보수일색 정치에 첫번 째 파열음은 무슬림 이민자 출신, 나히드 낸쉬가 캘거리 시장으로 당선 되면서 시작되었다. 올해 3선째로 확고한 기반을 쌓은 인도 출신의 이 정치인은 역대 시장들의 보수적 꼰대성향을 뒤엎고 SNS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업고 캘거리를 잘 이끌어 왔다.

알버타는 그동안 캐나다 연방에서 NDP 가 한 번도 정권을 잡지 못했던 유일한 주로 남아 있었던 터라 노틀리 좌파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수세력은 알버타 주민의 바닥에 깔린 보수심리를 이용하여 집요하게 흔들기를 해왔다. 마침 NDP가 정권을 잡을 즈음 시작된 글로벌 오일 가격 하락으로 알버타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 보수 세력의 흔들기는 더욱 힘을 얻어가는 형국이다.

사실 알버타주 경제불황은 현 NDP 정권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쉽지 않은 이유도 현정권의 무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정권, 즉 보수당 정권의 무능과 장기집권의 후유증으로 인한 것이다.

과거 오일경기가 붐을 이루었던 시절 아시아등으로 원유수출을 다변화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미국에만 의존했던 것과 엄청난 로열티 수입을 활용하여 알버타 경제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쓰지 않고 방만하게 써버린 결과 미국의 환경론자들이 득세하고 국제 오일 가격이 폭락해버리자 알버타 경제는 순식간에 바닥을 쳤고 이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지난 40년 보수당 1당 장기 집권이 초래한 포퓰리즘 등 정치 비효율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현 알버타 좌파 정부는 보수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을 올해까지 15불로 인상하는 안을 밀어부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주민들의 저항에도 환경보호를 위한 탄소세를 도입하여 정착시켰는데 이는 다음 총선을 앞두고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자살행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소수와 약자 보호, 지구환경보존이라는 좌파정부로서의 철학을 잃지 않고 소신껏 나아가는 것을 보면 노틀리 수상의 정치인으로서의 일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여년 전 알버타 주민들은 보수당 정권으로부터 1인당 40만원에 달하는 번영 보너스를 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4명이어서 160만원을 수표로 받았다. 당시 알버타 인구가 350만명 정도였으니 무려 1조 4천 5백억이라는 소중한 공적 자금이 주민들에게 1회성 선심으로 흥청망청 써버린 것이다.

이는 명백한 무개념 포퓰리즘 정치였다. 근래 이재명 성남시장이 이와 비슷한 선심행정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당당하게 스스로를 표퓰리스트라고 표명했다. 표풀리즘은 두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대중주의(또는 민중주의) 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추수주의다. 전자는 엘리트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기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재명 시장이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을 때는 이와같은 민주적 대중주의로서의 의미일 것이다. 후자는 정책의 제도적 시스템화에 반하는 것으로 임기응변식 인기 영합주의를 말한다. 시스템화를 벗어난 이와같은 인기영합주의는 매우 나쁜 정치의 한 형태이다.

나는 이재명 시장의 정치철학의 기본은 민중적 대중주의라고 보지만 이번 선심행정은 명백한 인기 영합 대중 추수의적 형태로 아주 나쁜 의미에서의 포퓨리즘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남아도는 돈은 당연히 공적 자금으로서 성남시의 미래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정 쓸데가 없으면 중앙정부와 협의하에 이웃의 가난한 지자체에 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돈을 받으면 우선 기분이 좋다. 그리고 아무리 미미해도 탄소세등 세금이 오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이율배반이다. 환경과 복지는 좋으나 세금인상은 싫어한다는 것. 이게 일반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거꾸로 가야 한다. 정치가 민의를 반영해야하지만 진정한 민주정치란 정치인의 앞서가는 세상에의 비전을 주민들이 말하고 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버타 보수당의 지난 세월 보인 포퓰리즘적인 정치와 미래에 대한 비전없는 정치는 당연히 배격되어야 한다. 반면에 NDP 좌파정부의 소신있는 정책 방향, 때론 주민들의 인기를 잃는 정책이라도 소수와 약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과 인류사회 나은 미래를 향한 것이라면 주저없이 시행하는 모습이야말로 참된 사회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캘거리는 올림픽으로 한국과 제법 인연이 있다.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때 캘거리는 같은 해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했었다.
그리고 이제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는데 캘거리 역시 2026 동계올림픽
유치신청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데 비해 경제적 효과는
미미하고 대회 기간 중 불편 사항도 많은 데다가 올림픽에 대한 관심과 호응도 옛날같지 않아서이다.

올림픽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스포츠는 정치와 무관하며 그래야한다고 떠들곤 있지만 대개는 헛소리. 역대 거의 대부분의 올림픽이 국내외적으로 정치에 이용당하고 휘말렸다. 사실 근대 올림픽의 시작부터가 정치적이었다.

지독한 인종주의자 쿠베르탱 영감탱이는 백인들의 우월성과 남성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일환으로 올림픽을 창시했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올림픽 창시였다. 그리고 "계집애들이 무슨 올림픽인가.." 라고 말하기까지 한 쿠영감탱이는 여성차별주의자였으며 세상엔 1등 백인 종족과 그외 2등종족이 있을 뿐이라고 외친 인종주의자였다.

그 전통에 따라 올림픽은 인종주의가 끊임없이 표출되어왔다. 심지어 레슬링 퇴출위기는 인종주의의 극명한 본보기다. 남자는 이란이 휩쓸고 여자는 일본이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독보적 종목인 양궁에서 오직 한국만을 겨냥하여 룰을 수없이 바꾸는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아도 올림픽은 백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잔치여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를린 올림픽은 인종주의 올림픽의 표본이었다. 아리안 족의 위대함을 알리는 올림픽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제시 오웬스라는 탁월한 인물과 손기정님에 의해 히틀러의 자존심은 팍팍 구겨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여성운동의 약진에 따라 여성 올림피안들도 획기적으로 늘어갔다. 인종 및 성 차별적 성격은 인류진보의 물결을 타고 희석되어갔다.

즉 정치적 인종적 한계를 가졌음에도 올림픽은 지구촌의 잔치로 발전해왔다. 그러한 올림픽 진보의 힘은 올림픽 정신에 있다. 많이 훼손되긴 했으나 여전히 고귀한 정신으로 추앙받는 순수한 아마추어리즘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인류 화합의 잔치라는 점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평창 올림픽의 남북 동시 입장과 여자 하키 단일팀은 올림픽 정신에 매우 부합하는 의미를 지닌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 위기를 해소하고 상호 긴장을 풀어내는 것에 이보다 더 극적인 이벤트가 어디 있었겠나. 평창올림픽을 이명박정권이 유치할 때 한반도의 통일염원을 담아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표를 받았다. 과거 여당이 단일팀 구성 등에 적극찬성한 것도 바로 이와같은 올림픽 정신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바가 크기 때문이다.

여자 하키 팀의 일부 선수들의 실망이 컸다는 점 이해가 간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여자하키도 평창 올림픽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 구경하게된 것 아닌가. 그동안 여자 아이스하키가 한국 스포츠계에서 무슨 존재감이 있었으며 올림픽 이후 스포츠의 대중적인 지속성 역시 거의 난망하다고볼 때 이정도로 국민적 관심 속에서 뜬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할 것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여자 아이스하키가 좋은 스포츠임을 국민들에게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니 단일팀은 좋은 결정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래 잘했던 종목외 많은 생소한 종목들에 우리 선수들이 참가하는데 하키와 함께 이런 종목들에 관심을 가지고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남북 단일팀 결성으로 선수 구성과 출전 시간에 변화가 생겼지만 결국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작은 출발로서의 의미, 즉 대승적으로 해결되었으니 그들이 비록 전패를 하였으나 이미 크게 승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올림픽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펜스 극우 기독주의자 가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나 아베의 똘만이 짓, 그리고 이 두 극우분자들이 개회식 때 단일팀에 대해 보인 무례함은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 정신을 말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한다. 여자아이스하키팀이 올림픽 정신에 맞추어 참가에 큰 의의를 두고 특히 남북이 하나로 뭉쳐 나온다는 것이 주는 상징성을 크게 부각시킨 것처럼.

그러면서도 올림픽이 주는 정치적 도움 역시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 단일팀으로 오랫동안 북핵문제로 전쟁위기 속에 힘들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딛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역사가 증명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우리사회 난맥상의 원인중 하나이다.

사회주의의 내용은 나쁘지 않으나 그것을 이념화 하니 인간이 오히려 고롭다.

진보는 좋은 것이지만 진보주의는 역시 인간을 피곤하게 한다.
뭐든 주의를 붙이면 일단 그것은 달콤한 거짓말이다. 인간 피곤하게 한다.

진중권이나 강준만 부류가 그러한 사람의 표본이다. 최장집이나 오마이 한겨례가

그런 경향을 경향신문과 함께 쉐어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신자유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백성편에 선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대처와 레이건이 눈이 맞아 세상을 말아먹었다.

그런데 신 자유주의는 전후 미국이 세계를 털어 먹다가 일본과 독일에 막히니까 나온

부자들의 경제 타개책이다.(영국이 붙어서 같이 먹었고)

경제전쟁에서 일본과 싸워선 이길 승산이 없으니 (영국은 독일과의 싸움) 신자유주의 들고 나와
미국내 하층민(그것도 백인하층민) 털어먹은 것이 신자유주의다. 레이거노믹스고 대처리즘의 본질이다.
물론 와중에 애꿎은 개발도상국들도 털렸지만 본질은 자국민 말려죽이는 것, 양극화가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좌파들은 신자유주의와의 힘겨운 싸움을 해왔고 일정부분 성공도 거두었다.
2008년에 몰아닥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가 자멸한 대표적 사례이고 영국의 브렉시트 역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자승자박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표방한 시장원리의 회복은 일정부분 국제경제를 회복시키고 특히 대한민국 같이
뭘 팔아서 먹고 살아야하는 나라에게는 기회가 된 점도 있다.
규제철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정부기능 강화 역시 나쁜 면도 있고 좋은 면도 있다.

무조건 신자유주의라는 잣대로 세상을 경직되게 가치 판단하면 결국 손가락 빨게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증명되고 있다.

80년대말에서 90년대말까지 가능했던 반 신자유주의 연대, 그게 2000년에도 여전히 통한다고 보면 시대착오다.

이미 골방에 사라진거. 그런데도 여전히 신자유주의 타령하고 있었다면 일단 거짓말장이고 지식 장사치라고 보아야했다는 말이다.
비근한 예가 한겨례 오마이 최장집 부류들이 입에 거품물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노무현의 FTA를 씹었던게 바로 그거다.

신자유주의 물론 나쁘다. 계약직 정리해고는 잔인하고 규제철폐 무한 경쟁은 위험하고 부자감세는 공정하지 못하다.
문제는 모든 관련된 정책을 무조건 신자유주의로 이름붙여 공격하는 것 역시 비겁하고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신자유주의자들과 그 비판자들이 무슨 '주의'를 들고 나오거나 그에 기반하고 있으면
일단 가짜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되지 못한 좌충우돌식(시쳇말로 무뇌아들) 이념장사를 보면 안다.

반공주의에 기반한 빨갱이 종북 타령이나 어버이연합등 반공 우익단체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나 기이한 행동들이
그러한 것처럼.

오늘 뜬금없이 신자유주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아니다.
핵심은 이러하다. 무슨무슨 '주의'를 들고나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하여 어쩌고 저쩌고하는 가짜들을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정치에서 다 솎아 내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가짜라고 보면 된다는 얘기다.


바른당과 국민당이 합당했다. 건전한 보수를 위하여 합당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가짜들의 생존전략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중도 타령, 개혁적 보수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라는 이념은 없다.

보수는 단지 지키는 것이기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그들은 가짜다.



화해와 중재의 국제 분쟁 조정자, Canada - 북핵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열것인가.
캐나다는 아주 오랫동안 국제 분쟁의 조정자로 자임하며 세계 곳곳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 유지군의 주도적 일원으로 참여해왔습니다.

UN 평화유지군, UN peacekeeping Force 는 1956년 2차 중동전쟁, 즉 수에즈 위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수에즈 운하를 두고 대치했던 상황을 평화적으로 타개하고자 캐나다 외무장관이었고 나중에 수상에 올라 캐나다 역대 가장 위대한 수상으로 칭송받는 피어슨(토론토 공항의 이름으로 명명된) 에 의해 주도되고 창설되었죠.
그후 수많은 국제 분쟁의 현장에서 캐나다는 뛰어난 능력과 헌신으로 각종 분쟁을 조정하고 화해로 이끌어 Reconciliation Canada 라는 명예로운 국제적 평판을 얻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한 베트남 참전도 끝끝내 거부하여 미국과 소원해지기까지 했지만 캐나다는 화해와 분쟁조정자로 남아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굳혀왔지요.(그러나 음으로 양으로 미국을 도와주는 포지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는 없었지만)

그러던 것이 90년대 초 발칸 반도와 르완다에서의 악명높은 인종청소 전쟁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에다 1994년 소말리아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캐나다군에 의한 현지인 린치 사건이 겹쳐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캐나다 명성은 흠이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보수당 정권에 의해 결정된 아프가니스탄 참전으로 캐나다의 화해와 평화유지라는 국제적 이미지는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사실 Reconciliation Canada 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유럽으로부터 이주해온 근대 캐나다 국가와 11000년전부터 살아왔던 이 땅의 원주민과의 화해를 말합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적 행보는 사실 이와같은 캐나다 내에 존재하는 분쟁과 다툼의 역사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위선과 거짓에 불과합니다.

프랑스와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이주하여 건설한 캐나다의 초기 역사는 원주민 학대와 차별, 그들의 문화 언어 말살로 이어진 캐나다의 흑역사입니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부당한 대우와 철저한 외면 속에 비극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캐나다 자유당 정부의 수장 저스틴 트뤼도 수상은 캐나다 정부가 자행해온 원주민 말살 정책과 차별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국제 분쟁의 화해자를 자임해온 캐나다로서는 만시지탄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사실 이 사과는 놀랍게도 전임 보수당의 하퍼 수상때 이미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신들의 흑역사에 대해 다소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는 보수당 정권이 사과를 하여 보수 본연의 도덕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한 합니다. 참고로 하퍼수상은 제가사는 캘거리 출신이며 제 이웃 동에 주민이기도 합니다.

http://nationalpost.com/news/politics/canada-and-u-s-touting-vancouver-meeting-on-north-korea-but-key-ally-japan-not-on-board

이제 다시 캐나다가 내외적으로 스스로 가진 가치, 화해와 공존, 평화와 조정의 이미지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습니다. 원주민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와 함께 그 시도의 하나가 북미간 화해와 핵위기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입니다.

지난 12월 초 캐나다의 외무장관이 제기한 United Nations Command Sending States Meeting 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만간 밴쿠버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회의를 갖자는 것입니다.

UNC 는 한국전쟁때 남쪽 정부를 돕기 위해 UN 에서 조직한 일종의 군사 그룹입니다.캐나다를 포함하여 모두 16개국이며 휴전협정의 당사자로서 여전히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이 조직을 움직여 북쪽과의 대화 테이블을 만들고 거기서 북미간 화해와 함께 북핵문제의 해법을 찾아내자는 것이죠.

이게 잘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벌써부터 UNC 비회원국 중 초청대상인 일본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지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캐나다가 이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트뤼도 캐나다 정부는 트럼프 망나니와는 아예 시작도 전부터 각을 세워왔으나 그래도 말이 통하는 틸러슨 국무장관과는 대화와 협력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캐나다는 중국과도 오랜 신뢰관계가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겠죠. 쿠바와도 미국이 따라올 수 없는 깊이로 상호 친분이 좋아 쿠바정부를 통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루트를 가지고 있죠.

이런 캐나다가 그래도 유일하게 말통하는 사람인 틸러슨 국무장관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북핵문제해결에 어쩌면 가장 적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티아 캐나다 외무장관과 틸러슨 국무장관이 사전에 충분히 교감하고 시작한 일이니만치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캐나다 수도 오타와의 국회 의사당 건물 앞에서.




개인주의 속성을 지닌 인간의 대표적인 본능적 행위 중 하나는 집단행동이다.양자는 매우 상대적이나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개인은 집단을 통해서 성장하며 집단을 변화시켜 결국 개인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양자의 관계는 매우 커다란 전략적인 의미를 지닌다.집단의 질적인 변화가 물리적인 운동에 의해 방향성을 지니게 되는데 여기서 질적변화의 구체화는 개인들의 집단에 대한 행동양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대별하여 부족주의는 보수화로 치닫고 팀플레이는 진보의 근간이 된다.

잠시 축구로 들어가보자.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는 메시와 현축구계를 양분하고 있다. 그는 레알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날들을 보냈다. 그런 그가 근래 최대의 위기에 빠져 있다.

노쇠화에 빠졌다는 둥 한계에 봉착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과거와 다른 점은 팀을 믿지 않는다는데 있다. 팀자체에 대한 불신에 동료들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 즉, 팀플레이가 상실된 것이다. 주변을 믿지 않으니 집단의 힘으로 전진하는 공식이 사라진 것이다.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나아가려하니 집단이 힘을 잃을 수 밖에. 보수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그에게 있어 레알 마드리드는 오직 자기를 위한 집단에 불과하다. 과거 레알을 통해 성장하고 레알의 팀전술에 녹아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오르려고 했던바 동료들을 믿고 동료들과의 협력에 의해 팀을 승리로 이끌며 자신을 최고로 만들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오로지 팀을 자신의 성공의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집단에 대해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부족주의적 퇴행행동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옛날 부족주의는 그저 영토와 지역정도로 단순했다면 근래의 이것은 지역별, 학력별, 계급별, 성별, 종교등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부족주의적 퇴행행동 집단을 들라면 검찰을 비롯한 관료조직, 탁상공론화된 교수사회 그리고 배타적 지역 또는 학벌 집단 및 종교집단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검찰 권력은 사회진보를 가로 막는 대표적인 부족주의적 집단이다. 그리고 입만 살아 그저 가르치려들고 우대받으려는 구조에 빠져있는 교수집단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부족주의 행태를 스스럼없이 보이는 것이 " 00 향우회' ' k대 동창회' ' 00교회' 같은 집단들이다.

'우리가 남이가' 는 부족주의의 대표적 슬로건이며 '묻지마 지지'는 부족주의의 강령이다. '차별과 배타주의'는 부족주의 행동의 결정체다. 따라서 부족주의가 횡행하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독재가 날뛰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상설화된 수많은 단톡방이나 밴드 조직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의 위험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부족주의적 행태를 sns로 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모순 속에서 갈등한다. 가만 있으면 퇴보하는 것이기에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쨋거나 사회 진보를 꿈꾼다면 팀플레이로 가야하고 천재가 나와야 하고 창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가 보편성의 원칙 속에서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며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각종의 봉건적 올가미를 걷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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